미술의 도시 안산 ③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장성순’


제454호(2018.5.30.)

본문

 

보이는 것 그 너머를 표현하는 ‘추상화’에 평생 바쳐

작품 200여 점 안산시 기증 … 안산의 화가로 사랑받길

 

예술가와 도시는 어떤 관계일까? 예술가에게 영감과 재능을 심어주는 여신 뮤즈처럼 도시라는 공간도 예술가와 끊임없이 기운을 주고받으며 창작활동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시는 예술가, 특히 화가에게 샘솟는 영감을 제공하는 또 하나의 뮤즈다. 고흐를 떠올리면 뜨거운 태양빛이 쏟아지는 프랑스 아를지역이 떠오르고 작곡가 윤이상과 통영의 바닷가 풍경이 함께 생각나듯이 언젠가 ‘추상화가 장성순’ 하면 ‘안산’을 떠올릴 날이 오지 않을까? 1990년 안산으로 이사와 작업실을 열고 마치성실한 노동자처럼 매일매일 작품을 그려온 장성순 화가.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추상화가 장성순 화백을 소개한다.

 

남종화가의 거목 허백련에게 그림 배워

함경남도 함흥출신인 장성순 화백은 어릴 때 심한 중이염을 앓고 왼쪽 귀 청력을 잃었다. 함흥의 갑부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분에 당시 유명한 시서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2년 반 집에서 묵었던 남종화의 대가 허백련 선생과의 만남은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 화백은 한 대담집에서 “허 선생님과 매일 같이 지내다 그림을 좋아하게 됐어요. 허 선생님이 가끔 나에게 붓을 쥐어 주어 그리게 하면서 가르쳤어요. 그림에 눈을 뜬 건 그때였죠”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유년의 행복했던 추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격동의 세월에 태어난 화백의 삶이 평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세 차례의 전쟁을 마주해야만 했던 역사적 현실과 청력을 잃어가는 개인적 시련은 그를 내성적이며 사색이 깊은 청년으로 자라게 했다. 우리나라 5대 고보 중 하나인 함남중학교(함흥고보) 졸업 후 맞이한 해방. 해방은 장 화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넉넉했던 살림은 오히려 죄가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감옥살이를 하고 모든 재산을 빼앗긴 후 남쪽으로 도망쳐왔다.

 

우리나라 추상 미술의 대표 주자로 성장

감수성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장 화백에게 미술은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당시에는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가 없었다. 입학한지 1년 만에 장애를 이유로 학교로부

터 퇴학처리 된 후 그림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미술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뎃생과 유화를 공부했다.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힌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화가 그룹의 리더로 성장했다.

1956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추상화가들의 모임인 ‘현대미협’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장 화백이었다. 당시 젊은 화가들끼리 모여 ‘현대미협’을 창립하고 ‘현대미협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는 우리나라 미술화단에 추상화를 소개한 대단히 획기적인 전시회로 평가 받고 있다. 현대

미협을 창립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장 화백은 “사실적인 그림에서 조금 벗어나면 무조건 국선에서 낙선 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죠…. 거창하게 추상화를 하자고 해서 만든 게 아니라 기존화단에 대한 대항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젊은 작가들의 도전은 당시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성순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알린 계기가 됐다. 장화백은 196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파리비엔날레(1961년) 도쿄비엔날레(1967년)에 작품을 출품했다. 당시 그가 출품한 작품은 모두 엥포르멜풍 작품으로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평을 받았다.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미술 ‘추상’ 

그림을 좋아하고 감수성 예민하던 청년이 3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성장하고 또 귀까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찾아가는 그림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

미술 평론가들은 장성순이 작업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상작품을 고수하여 나아감으로써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시각화한다든지, 이성과 논리보다는 직관과 감각에서 출발하여 순수 추상의 결정체에도달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돌의 거친 표면을 보면 내 나름대로의 이미지가 보이고 그걸 그리고 싶었다”는 장 화백. 한 평론가는 그의 그림에 대해 “외곽의 프레임이 마치 그리스시대의 석비(石碑)를 연상시키면서 장성순이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왔던 돌이라는 오브제가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다”고 표

현했다.

 

지난해 작품 207점 안산시에 기증

장성순 화백은 1990년 안산으로 이사와 30년 가까이 안산에 살고 있다. 장 화백의 딸 지영 씨는 아버지이며 존경하는 화가인 장성순 화백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녀가 홍익대학교에서 예술기획학을 전공한 것도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추상화를 그려온 ‘장성순 화백’을 주제로 논문도 준비 중이다. 장지영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성실한 노동자다. “아버지는 정말 성실한 분이셨다. 가족을 위해 가장의 역할도 충실히 하셨지만 화가로서의 삶도 그랬다. 꾸준히 개인전을 여시고 매년 단체전에 출품을 하시는 등 작가로 정말 열심히 사셨던 분이다. 작품을 하실 때는 런닝 차림으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캔버스와 씨름을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는 장지영 씨.

장 화백은 지난 2017년 작품 207점을 안산시에 기증했다. 유일한 상족자인 지영 씨의 역할이 컸다. 장지영씨는 “아버지는 늘 안산이라는 도시를 참 좋아하셨어요. 안산에 온 후 작품이 더 잘 그려진다고. 이 도시와 잘 맞는 것 같다시면서 이사하신 걸 참 잘했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고잔동에 있던 아뜰리에를 정리하니 아버지가 평생 그린 작품이 한 500여점 되는 것 같아요. 작품을 기증한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요. 앞으로 아버지의 작품이 안산시민들에게 사랑받도록 안산시가 노력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혜경 편집위원